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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설화△숭례문 밖의 남지=정승이었던 미수 허목은 남인으로 그때 남지를 팠었는데 이제 다시 남지를 파는 것을 보니 다시 남인 출신의 정승이 나오겠다는 것이다. 과연 남지를 판 바로 그해에 남인의 거두 채제공이 등용되었다고 한다.근세에 탄압을 받아가며 활약했던 혁신 실학자들을 ‘남지의 연꽃’으로 비유한 것은 바로 실학이 남인파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이 남지는 1907년에 이르러 완전히 매립되었다. 건축공사 도중 이 못에서 동으로 만든 거북이 나왔다고 한다.△해주의 부용당=황해도 도청 앞 뜰안에는 ‘연당청우’의 시정으로 유명한 부용당이 있다. 연당 안의 많은 연꽃 가운데 세워진 건물이라고 하여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이 부용당이 있는 곳은 옛날 황해도 관찰사가 시무하던 선화당 뜰안이요, 또 목사가 시무하던 객관 부근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조선 연산군 6년에 목사 윤철과 판관 정자지에 의하여 처음 세워졌다가 중종 21년에 목사 김공망에 의하여 개축되었다.이 건물은 우아한데다 연꽃의 은은한 향기, 연잎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까지 곁들여 그 경치와 운치가 말할 수 없이 좋았다고 한다. 고래로 관서팔경에 선정되었는데 이른바 ‘해주의 연당청우’이다.따라서 많은 시인묵객들이 여기에 올라 시를 읊었는데 명종대의 유명한 시인 북창 정렴은 부용당의 경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일만의 연줄기 묶어 세운 듯하고붉은 난간은 작은 연못을 누르고 있네푸른잎 바람 따라 새 일산처럼 춤을 추고붉은꽃 옛송이에 향기 아직 풍기네그윽한 꿈은 저녁 빗소리에 놀라 깨게 되고초저녁 서늘한 바람은 웃섶의 땀을 말려주네마침 푸른잎 맑은물이 있는 곳 바라보니원앙새가 짝을 지어 노닐고 있네그후 그의 넷째 아우 만죽헌 정현이 명종 연간에 해주 목사로 부임하여 부용당에 올라가 보니 숱한 명사들의 시를 현판에 새겨 걸어 놓았는데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득의(得意)의 시한 수를 지어 새 현판을 걸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달빛에 연꽃향기 이 맑은 밤에그 누가 부는가 옥퉁소 소리열두 간 두룬 난간 잠은 아니오고벽성의 깊은 시름 끝이 없어라-정현, <해주부용당>, 《만죽헌유고》연못에는 연꽃이 만발하여 그 풍겨오는 그윽한 향기와 부드러운 달빛으로 어우러진 맑은 밤에 어느 신선이 부는 듯 멀리서 은은히 옥퉁소 소리가 들려온다. 열두 간 대청을 두룬 헌함에 기대어 있어도 잠은 오지 않는데 그 옛날 벽성선에 대한 그리움… 선연(仙緣)이 없음이 한스러울 뿐이다.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여기서의 벽성을 해주의 고호로 오인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것은 해주에서 생산되는 먹을 명한 글에 “벽성의 정기”라고 한 것처럼 벽성이 해주의 고호로 많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벽성의 열두 난간”이라고 하는 구절을 따온 것이다.그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병들이 일시 해주에 들어와서 이 부용당에 올라가서 시가 쓰인 현판을 보고 다 떼어서 부수고 불태워 버렸는데 이 정현의 현판만은 그대로 붙여 두었다고 한다.임진왜란 때 왕실과 정부 일행은 의주로 피난을 떠났다가 한양이 수복된 다음에도 곧 환도하지 아니하고 귀도중 해주에 들러 1개월여 이 부용당을 중심으로 머물렀다. 그후 선조가 행재소로 삼았던 부용당의 방에는 ‘주필당’의 현액이 붙고 그앞 연못가에는 ‘선조대왕주필기적비’가 서게 되었다. 지금의 기적비는 철종 14년(1863년)에 새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선조·광해군 때의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정현의 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정현이 해주 목사로 부임하자 부용당의 여러시액들을 모조리 떼어서 장작으로 때게 하고 자기의 시를 걸어 당시 인구에 회자되었으나, 그 교만함을 몹시 미워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들어와 그 이후로 또 추가된 부용당의 많은 시액들을 불사르면서, 정현과 김성일의 시만 남겨 두었다. 김성일의 시는 워낙 일본 사신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요, 정현의 시는 왜적도 그것이 절창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또 조선 후기의 문신 신위는 그의 <논시절구>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달빛에 연꽃향기’를 읊고 정현의 시가‘남루의 종소리’를 어이 그리 닮았는고안식 갖춘 왜인도 있었음인지이 시만은 탈없이 모셔 두었네이 부용당 연못에 대해서는 또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즉 부용당이 아직 세워지기 이전으로 올라가서 세조 때에 유명한 남이 장군이 해주에 온 일이 있었는데 밤만 되면 이 넓은 연못에서 수많은 개구리가 울어대니 부근의 관사와 민가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