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제스프리, 구조부터 묶지 않으면 브랜드는 없다
한국형 제스프리, 구조부터 묶지 않으면 브랜드는 없다
  • 권성환
  • 승인 2025.06.1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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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과일이 제값을 받지 못하는 건 품질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품질을 '기억시키는 방식'에 있다. 국내 과수산업에는 각자의 생산자가 있고, 품종이 있고, 마케팅 시도가 있지만, 이를 연결해주는 구조가 없다. 생산은 분절돼 있고, 유통은 산지별로 흩어져 있으며, 브랜드는 소비자의 기억에 닿지 못한다.

과수산업의 위기는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품종이 아무리 좋아도 판로가 없다면 농가 소득은 오르지 않는다. 신품종 보급도 마찬가지다. 초기 물량은 부족하고, 인지도가 낮아 계통 출하조차 못 한 채 산지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농가는 묶이지 않고, 시장은 외면한다.

그래서 제안된 것이 ‘한국형 제스프리 시스템’이다. 뉴질랜드 제스프리는 단순한 브랜드가 아니다. 생산과 유통, 판매를 하나의 체계로 묶은 구조다. 전국의 농가가 같은 기준으로 생산하고, 브랜드는 출하 시점과 가격을 통제하며, 수출까지 단일 통로로 관리한다. 이는 하나의 민간조직이 실질적 권한을 갖고 실행을 주도했기에 가능했다.

한국형 통합모델도 결국 같은 방향을 요구한다. 지역 단위의 전문생산단지를 조성하되, 그 위에는 유통과 마케팅을 책임질 실행조직이 있어야 한다. 이 조직은 단순한 협의체가 아닌, 계약재배, 브랜드 운영, 시장 전략까지 총괄하는 주체여야 한다. 정부는 이 구조를 제도·기술·예산 측면에서 지원하는 후방 파트너로 기능해야 한다.

핵심은 생산-유통-마케팅의 전문화를 전제로 한 ‘기능 일원화’다. 기능을 따로 두되, 시스템은 하나로 묶는다. 이원화된 실행구조가 구축돼야 품질 관리와 가격 안정, 연중 공급이 가능해지고, 그때 비로소 국산 과일이 경쟁력을 갖는다.

현장은 이미 경고하고 있다. 일정 물량이 없으면 유통조차 어렵고, 저장성이 부족하면 연중공급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고급과일 위주 유통구조로는 전체 농가를 보호할 수 없다는 현실적 지적도 잇따른다.

소비자는 당도와 신선도, 저장성을 기준으로 과일을 고른다. 하지만 산지는 여전히 품목 단위로만 표시할 뿐이다. 당도 중심 선별, 정보 중심 유통, 브랜드 중심 소비로 이어지는 사슬이 작동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좋은 품종’이 아니라, ‘기억되는 시스템’이다. 품질은 생산에서 시작되지만, 가치화는 구조가 만든다. 과수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원한다면, 그 시작은 구조화된 실행조직과 통합된 브랜드 체계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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