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 원예산업신문
  • 승인 2005.1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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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국화에 대한 문화적 인식이나 관념은 일찍이 중국에서 먼저 형성되었다.문화의 이식과정에서 중국의 국화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또 선인들은 이를 적극 수용하였다. 국화의 상징성은 중국과 우리나라가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군자·은자=남부지방에서 불리는 <각설이 타령>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굿자(九字)나 한 장 들과 봐구월이라 국화꽃화중군자(花中君子) 일러있고이와 같이 국화는 매화·난초·대나무와 함께 사군자로 일컬어 왔다. 또 국화·연·매화·대나무를 사일이라고 한다.국화는 또 가우(佳友)라고도 하는데 모란 작약과 함께 삼가품이라고 한다.군자는 뜻이 맞는 친구를 선택한다. 삼익우가 있는데 솔·대나무·매화가 여기에 들어간다. 매화와 대나무는 군자이기도 하고 익우(益友)이기도 하지만 국화는 여기에 제외되어 있다. 그 이유를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볼 수 있다.국화의 고귀함을 인정하면서도 ‘국화는 은일자’라는 성격을 부여한 것이다. 이 영향으로 국화는 은군자 또는 은사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고 대중은 하나의 선을 획책해 놓은 꽃으로 위치를 굳혀 버린 것이다.국화는 뭇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이나 여름을 피하여 황량한 늦가을에 고고하게 피어난다. 자연의 현상에서 인생의 진실을 배웠던 우리 선조들은 늦가을 찬바람이 몰아치는 벌판에서 외롭게 피어난 그 모습을 보고 이 세상의 모든 영화를 버리고 자연속에 숨어사는 은사의 풍모를 느꼈던 것이다.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꽃의 외화(外華)보다는 꽃에 담긴 덕(德)과 지(志)와 기(氣)를 취했는데 국화는 일찍 심어 늦게 피니 군자의 ‘덕’이요, 서리를 이겨 피니 선비의 ‘지’며, 물 없어도 피니 한사의 ‘기’라 하여 이를 국화의 삼륜(三倫)이라 하였다.또 위나라 종회는 <국화부>에서, 국화에는 다섯가지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였다.첫째, 동그란 꽃송이가 높다랗게 달려 있음은 천극(天極)을 본 뜬 것이요둘째, 잡색이 섞임이 없이 순수한 황색은 땅의 빛깔이고셋째, 일찍 심어 늦게 피는 것은 군자의 덕이며넷째, 서리를 뚫고 꽃이 피는 것은 굳세고 곧은 기상이요다섯째, 술잔에 꽃잎이 떠 있음은 신선의 음식이다.중국 역사상 가장 전형적인 은사로는 도잠(365~427년)을 꼽는다.그는 육조시대의 전원 시인으로 <귀거래사>와 더불어 지조와 은일의 상징으로 그 이름이 높았다.가난한 선비였던 도연명은 호구지책으로 천성에 맞지 않는 관직에 몸담았다가 80여일만에 사직하고 <귀거래사>를 썼는데 그속에 있는 다음과 같은 시구로 은사 도연명과 국화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삼경(三逕)은 이미 황폐했으나소나무와 국화는 여전하구나또 송나라의 범석호는 <국보>의 서에서 국화의 은사적은 풍모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가을이 되면 모든 초목들이 시들고 죽는데 국화만은 홀로 싱싱하게 꽃을 피워 풍상 앞에 오만하게 버티고 서 있는 폼이 마치 유인과 일사가 고결한 지조를 품고 비록 적막하고 황량한 처지에 있더라도 오직 도(道)를 즐기어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인고와 절개=국화는 온갖 꽃이 만발하는 봄.여름을 마다하고 서리가 내리고 찬바람이 부는 늦가을에 고고히 피어난다.국화에는 오상·상하걸·세한조 등의 아칭이 있는데 이것은 늦은 가을에 다른 대부분의 꽃이 시들고 난 후에 서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연하게 꽃을 피우는 국화의 내한성에 연유한 것이다.이와 같은 국화의 생태는 인간사회에서의 현실저항을 상징한다.또 오랜세월 격정과 고통을 견디어 낸 인간의 인고와 희생을 상징한다. 그리고 외압에 굴하지 않고 굳은 의지로 살아가는 기골찬 인물에 비유되기도 하고 온갖 유혹과 무서운 고초에도 굴하지 않는 충절과 여인의 절개를 상징하기도 한다.꺼져가는 고려 사직을 지키려다 순사한 정몽주는 그의 장편시 <국화탄>에서 “나는 국화를 사랑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국화는 곧 충절을 상징하는 것이다.부녀자들이 사용하는 비녀에는 그 머리에 국화무늬를 새긴 국화잠이 있다. 이 국화잠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부녀자의 절개를 상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