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면 안된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면 안된다!
  • 원예산업신문
  • 승인 2017.01.0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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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합리주의 철학자인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말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 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스피노자는 범신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였지만 농업인이 아니었기에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하지만 사과나무를 심어서 과실을 달아본 사람이라면 이 철학자의 말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과는 자신의 꽃가루와는 수정이 되지 않는 ‘자가불화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다른 품종의 꽃가루로 수분을 하여야 하는데 이를 위해 수분수 전용 꽃사과 품종 혹은 자가불화합 인자형이 다른 재배 품종을 혼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과나무는 왜 불편하게 ‘자가불화합성’을 가지게 되었는가?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화분이 암술머리에 떨어질 경우 화분의 발아가 억제되거나 발아한 화분관이 암술머리 조직에 침투하지 못하여 종자를 만들지 못하는 것으로 자가수정을 억제하기 위한 일종의 식물 면역 현상이다. 자신의 꽃가루로 자가수정을 반복할 경우 다양한 형질의 유전자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생육에 불리한 환경이 되었을 때 생존이 어려워지게 된다. 다양한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자손을 번식하기 위한 사과나무의 생존 전략인 것이다. 동물에서의 근친교배 억제가 식물인 사과나무에서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속씨식물이 과로 분화할 무렵 진화과정 중 나타났으며 전체 식물의 절반 정도가 이러한 기작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공적인 사과 재배를 위해서는 자가불화합 인자형이 서로 다른 품종을 혼식해야 한다. 대표적인 사과 품종인 ‘후지’는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사과연구소에서 육성하여 농가에 보급하고 있는 ‘아리수’와 ‘썸머킹’ 품종이 수분수로 적합하다. ‘후지’ 품종 다음으로 많은 재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국내 육성 품종인 ‘홍로’의 안정적인 결실을 위해서 자가불화합 인자형이 다른 ‘서홍’과 ‘썸머킹’ 품종이 추천된다.

창세기에 나오는 대홍수를 대비한 노아의 방주에는 인간과 동물들만 실었지만, 지구의 종말을 대비한 21세기 노아의 방주에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식물들도 실어야 하고, 특히 사과나무는 자가불화합 인자형이 다른 두 그루의 사과나무로부터 접수를 채취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이제 우리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자가불화합 인자형이 다른 두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하겠다.

■김세희<농진청 원예원 과수과 농업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