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발전 우리가 이끈다 / 광미실업(주)
농업발전 우리가 이끈다 / 광미실업(주)
  • 원예산업신문
  • 승인 2006.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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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버섯배지용 솜 공급업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97~98년부터이며, 광미실업㈜은 그보다 약 10여년 앞선 80년대 후반부터 국내 최초로 버섯배지용 솜을 공급하고 있다. 법인 설립 전에 이미 광미실업 이라는 상호로 버섯배지를 취급했다. 광미실업(주)은 배지용 솜의 브랜드화 및 규격화를 선도, 버섯의 품질향상 및 재배농가의 소득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최형기 사장은 80년대 농어민후계자로서 한우축산과 버섯을 재배하던 농민이었다. 복합영농에 종사하던 당시 버섯 재배기술 관련책자가 미약하여 많은 애로점을 느끼고 직접 실험을 통해 기술을 터득했다. 또 자신의 노하우를 농가에 전수하여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지도했다. 93년에 광미실업을 법인화 하기에 이르렀고 버섯재배 기술지도 책자도 발간하게 되었다.이 기술지도서는 1~2년에 한번씩 발간되고 있는데 5,000~10,000부씩 전국의 버섯재배 농가에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80~90년대 초까지는 버섯배지용 솜을 폐면, 폐솜이라고 흔히 불렀다. 폐면은 본래 방적공장에서 실을 생산할 수 없는 단섬유를 일컫는 말이다. 이같은 방적 전문 용어가 버섯 분야에 그대로 사용돼 왔다.최 사장은 폐기물, 폐수, 폐차와 같이 어감상 거부감으로 인하여 '폐면' 이라는 용어가 버섯 쪽에 부적절하다는 판단했다. 95년 이전부터는 농가에 공문 발송 시 버섯배지용 솜에 대하여 ‘방울솜’ 이라는 브랜드를 개발, 최초로 사용했다. 95년부터는 버섯관련 신문 및 잡지의 광고, 자사에서 발행한 홍보책자에 ‘광미방울솜’ 등과 같이 브랜드명으로 홍보했다. 최 사장은 “사업초기 상품화가 되지 않아 이물질 및 쓰레기가 함유되어 있는 제품을 농민에게 팔았는데, 농민에게 미안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한 때는 농어민후계자였다는 것을 지금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다”고 최 사장은 덧붙였다. 농심을 잃지 않고 늘 농민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사업을 하기로 스스로 다짐을 했었기 때문이다.90년초 최 사장은 배지솜의 상품성을 높이고 브랜드화하기 위해 외국 현지에 직원을 파견, 지사를 설립하고 품질관리에 들어갔다. 95년에는 외국현지에 공장을 세우고 각 지역별로 자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품질 규격화에 박차를 가했다.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지난 2000년부터는 외국 현지의 모든 공장으로 품질 규격화를 확대할 수 있었다. 각 브랜드 별로 즉, 방울솜, 스피닝, 지닝, 스피닝지닝믹스의 규격을 만들어 제품을 생산, 국내 농가에 공급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다년간에 걸친 그의 노력은 버섯의 품질향상과 다수확 및 재배농가의 소득증대로 이어져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최형기 사장은 자사의 무형자산인 방울솜의 품질보증과 소비자인 농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이 개발한 방울솜과 스피닝, 지닝, 스피닝지닝믹스 등을 상표로 등록했다. 상표 등록 후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업체들로만 국한하여 3개업체(보성무역, 신원G.M.C, 천일공사)에 통상사용권을 설정하고 버섯재배 농민들에게 양질의 솜을 공급하기 위하여 서로 협력하고 있다.폐면, 폐솜은 말 그대로 ‘폐’면과 ‘폐’솜에 불과하여 규격이 없다. 이를 규격화하고 상품으로서 가치를 부여한 것은 자사의 이득에 앞서 농민보호 차원에서 시도된 것이라고 최 사장은 설명했다.오늘날 광미실업㈜이 버섯업계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높은 인지도를 유지하고 있는 배경에는 농민들을 향한 최형기 사장의 남다른 애정이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최 사장은 현재 한국버섯배지협의회장과 사단법인 한국버섯학회 이사 겸 사업간사, 남도버섯연구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강대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