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과일 이야기 5 - 대한민국 과일산업대전 가작 (김미숙)
나만의 과일 이야기 5 - 대한민국 과일산업대전 가작 (김미숙)
  • 원예산업신문
  • 승인 2013.12.3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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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좋아

“엄마는 어떤 과일이 제일 좋아?”
딸아이가 물으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는 사과가 제일 좋아!”하고 대답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 어떤 과일이 좋은가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늘 대답은 한결같다. 그 대답처럼 나는 내가 사과를 정말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사과가 좋아’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내 눈과 손은 다르게 행동했다. 과일이 오직 사과 한 종류만 있을 땐 선택의 여지없이 자연스럽게 사과를 먹을 뿐, 다양한 종류의 과일이 있을 때 사과는 늘 마지막으로 손이 가거나 아예 손도 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왜 진짜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늘 사과가 좋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살았을까? 그것도 수십 년을. 그 이유를 굳이 찾지 않았던 이유는 어떤 과일을 좋아하는가가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요하지 않더라도 왜 그랬을까 궁금해진 이후로 오래 전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렵지 않게 그 이유가 생각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평소에는 술을 잘 드시지 않던 아빠가 한 번씩 술을 드실 때면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고 들어와 엄마를 많이 힘들게 했다. 밤새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듣다듣다 지쳐서 엄마가 “이제 그만 하고 잡시다!”라는 말을 할 때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화가 폭발해 잠자고 있던 우리 4남매가 모두 잠에서 깨고 마는 일이 되풀이 되었던 시절이었다.
그 때 나는 무슨 생각으로, 어디서 긁어모은 용기로 아빠한테 그리 대차게 대들었을까? 아빠보다 더 큰 소리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울고불고 하다가 지쳐 쓰러졌고, 아침에 일어났을 땐 목이 부어 침도 못 삼키고 기침까지 발작적으로 하며 하루 종일 일어나지 못했다. 엄마까지 동네 들 일을 거들어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형편이었는데, 그 날 엄마는 일을 나갔다 오셨는지, 언니와 남동생은 학교에 다녀왔는지, 9살이나 어린 막내 동생은 어쩌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간간이 이마의 물수건을 갈아주시며 한숨 쉬던 엄마와 다 저녁때 아빠가 들고 오신 크고 새빨간 사과만 기억에 남는다.
딸을 아프게 만든 원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아빠는. 세 끼 밥 먹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던 그 시절에 과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는데 아픈 딸을 위해 사과 한 봉지도 아니고 달랑 한 알을 구해온 아빠의 심정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 사과를 보면서 아빠를 원망하는 마음이 더 커졌던 것 같다. 그 사과를 어떻게 했을까? 그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과의 잔상은 계속 남았던지 어디서든 사과를 보면 조용히 사과를 밀어 놓던 아빠가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하필 사과였을까? 기침에 좋은 과일이 배라는 걸 모르셨을까? 베어 물기 쉬운 연시를 구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였나?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만약 그 때, 아빠가 내게 주신 게 사과가 아니라 배였더라면 내가 지금 좋아하는 과일은 배였을 테지.
그러다 얼마 전에 마트에 가서 본 사과를 보고 생각했다. 한쪽에는 무더기로 쌓아 놓은 사과가, 한쪽에는 크고 어느 한 군데 흠도 없으며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동그란 걸 두 개, 세 개 씩 따로 포장해 진열해 둔 사과가 있었다. 사과뿐만 아니라 배, 단감, 연시, 귤, 키위, 바나나 등 수많은 과일이 가득 찬 그곳에서도 포장된 사과는 유난히 예쁘고 빛이나 눈길이 더 갔다.
아빠도 그랬을까? 탐스럽고 예쁘게 빛나는 사과 한 알을 보고 아픈 딸아이에게 먹였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셨을까? 지금 사과를 상상만 해도 침이 고이는데, 아빠도 그 사과를 보고 침을 삼키셨을까? 모를 일이다.
평생 부인과 자식들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해 본 적 없는 아빠를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가끔 전화통화를 할 때면 “찬바람 나니 가온이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라.”라며 손녀딸을 걱정하신다. 내가 낳은 딸아이가 감기에 걸려 밤사이 기침을 하느라 잠을 설치면 그 기침 소리 들릴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 해 같이 잠 못 이루는데, 이제야 우리 아빠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도 기댈 곳 없이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했던 그 시절의 젊은 아빠에게도 위로가 필요하고 숨 쉴 틈이 필요하다는 걸, 그 당시 아빠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전에는 그저 막연하게 좋아하는 과일이 사과였지만, 이제는 기꺼이 즐기며 사과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많은 과일 속에서 손이 제일 늦게 가도 여전히 좋은 건 사과라고. 왜?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게 다르듯 좋아하는 과일과 잘 먹는 과일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이젠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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