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감초 재배를 돌아보며
조선시대 감초 재배를 돌아보며
  • 원예산업신문
  • 승인 2020.02.10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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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고 풀이 많은 것은 불리한 조건
관리 잘하면 원산지국가 못지 않게 충분한 승산 있어

감초는 탁월한 감미와 효능으로 동서양에서 널리 쓰여 온 약재이다. 원산지 국가에서는 야생 감초가 흔하기 때문에 따로 재배할 필요가 거의 없었지만, 감초가 나지 않는 우리나라는 입장이  달랐다. 우리나라는 한방에서 대량으로 사용하는 감초를 무역을 통해 조달해야만 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감초 재배를 시도해 왔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 11년에 개성 유후사 이문화가 재배한 감초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문종 1년에는 각 도에 감초를 나눠 심도록 명하고 재배를 소홀히 한 광양의 관리에게 죄를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감초 재배의 역사는 공식 기록으로만 최소 600년이 넘었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이는 감초의 속성을 잘 몰랐기 때문인데, 알았다 해도 당시 기술로는 성공하기 쉽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조선시대는 기후적으로 소빙기(小氷期)가 극에 달했던 시기이다. 이 때문에 냉해, 한발(가뭄),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집중되고 여러 차례 대기근이 발생했다. 감초는 저온 기후에서도 생존력이 강하지만 약재로 쓸 만큼 잘 자라지는 않는다. 또한 단단한 토양에서 뿌리를 깊게 뻗지 못한다. 조선시대 심경법(深耕法)이 도입되기는 하였지만 소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기계를 이용한 깊이갈이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건은 상업재배를 어렵게 해도 재배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선시대 감초 재배를 실패로 이끈 가장 큰 요인은 강우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는 몬순 기후로 여름철 비가 집중된다. 감초가 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나 강우로 인해 토양과 함께 흩어지는 병해충에는 매우 취약하다. 특히 갈색점무늬병은 한번 퍼지면 밭 전체를 초토화시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감초 꽃이 피는 시기는 우리나라 장마철과 거의 일치한다. 강한 비에 꽃잎이 손쉽게 떨어져 나가거나, 간신히 종자를 맺었다고 해도 그 수가 원산지의 야생감초에 비해 매우 적었을 것이다. 여기에 잡초의 위협도 한 몫 했으리라 본다.

잡초의 초세(세력)는 강우량과 기온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데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여름 한철만 방치해도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잡초 밭이 형성되고 만다. 감초는 사막에서라면 어떤 식물보다 강하지만 몬순기후에서는 잡초와 경쟁이 되지 않는다. 풀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비닐멀칭(비닐덮기)인데 조선시대에는 모든 것을 인력으로 해결해야 했으므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농촌진흥청은 1990년대 후반부터 지방자치단체, 농가와 함께 감초 기초 재배 연구를 진행해 왔다. 그 결과, 5~6년 전부터 10a당 약 800kg의 생산성을 확보하게 됐다. 2017년에는 수량이 많은 신품종도 개발했다. 감초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감초가 잘 적응하는 환경에서 재배도 무조건 잘 된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상업적 재배에서 이러한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땅에서 감초를 재배하기에 유리한 점이 많다. 여름철에는 고온이 지속되고 토양에는 수분이 풍부하다. 토양 유기물이 많고 비료를 많이 주는 다비성 재배에 익숙한 것도 장점이다. 반면 앞서 비가 많이 오고 병해충과 풀이 많은 것은 불리한 조건이다. 까다롭긴 하지만 관리를 잘하면 원산지 국가 못지않게 충분한 승산이 있다. 야생 감초 고갈로 인해 재배 감초 시장이 커지고 있는 국제 정세도 나쁘지 않다. 정밀한 환경 연구를 통해 생산성과 품질을 한 단계 더 높여 다가오는 재배 감초 시대를 대비해야 할 것이다.

■김용일<농진청 원예원 약용작물과 농업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