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의 뜻 모아 우장춘상 제정, 젊은 과학자 발굴·육성 등 적극 추진
지난 9일 서울시 양재동 aT 센터에서 이병일 발기인공동대표, 이장무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 사회 각계각층 100여 명의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우장춘기념재단 설립을 위한 발기인 대회 및 창립총회가 개최됐다.
우장춘기념재단 창립준비위원회는 우장춘 박사의 빛나는 학문적 업적과 대한민국 원예산업의 초석을 다진 크나큰 공로를 기리고, 우리나라 농산업 경쟁력 제고 및 농업·농촌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추진됐다.
이번 발기인 대회 및 창립총회에서는 (재)우장춘기념재단 정관을 심의·채택 하는 한편, 임원진을 선출했다.
선출된 초대 임원진에는 이사장에 이병일 서울대 명예교수, 이사에 전창후 한국원예학회장, 김창남 한국종자협회장, 우승기 단양우씨 대종회 회장, 강상조 전 농진청 차장, 박종서 박사, 감사에는 오대근박사와 고관달 전 원예원장이 맡게 됐다.
이날 선출된 이병일 초대 재단이사장은 “그동안 우장춘 박사 관련 추모회, 기념물 조성 등의 사업이 농촌진흥청과 일부 지자체에서 간헐적으로 추진됐으나, 우장춘 박사의 정신을 우리나라 국민에게 특히 청소년 세대에게 지속적으로 제대로 알릴 수 있는 사업이 없어 여러 사람이 안타까워했는데 뒤늦게라도 우장춘기념재단을 설립할 수 있게 됐다”면서, “앞으로 우장춘 박사 업적 바로 알리기, 국립농업박물관 우장춘기념관 만들기, 우장춘 상 시상, 젊은 과학자 발굴·육성, 기부자 지정사업 등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면서 전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재단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우장춘기념재단은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을 모아 기금을 조성하고자 다양한 모금활동을 계획하고 있으며, 이병일 재단이사장은 기부금 1억 원을 약정했다. 재단은 금년 12월경 농림축산식품부에 비영리재단법인 등록을 신청할 계획이다.
■우장춘 박사의 발자취
◆ 환국전
1898. 04. 08.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출생
1916. 03. 19. 일본 히로시마현립 구레중학교 졸업
1919. 07. 02. 일본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 졸업
1920. 06. 07.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기수
1936. 05. 04. 일본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 학위 취득
1937. 09. 11. 일본 교토 다키이종묘 연구농장장
1945. 10. 01. 일본 교토 초우호우지에서 칩거
◆ 환국후
1950. 03. 08. 귀국
1950. 05. 10.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
1953. 08. 01. 중앙원예기술원장
1954. 04. 20. 학술원 추천회원 피선
1957. 12. 23. 제1회 부산시 문화상(과학상) 수상
1958. 01. 23. 원예시험장장
1959. 08. 07. 대한민국 문화포장 수상
1959. 08. 10. 서거
■우장춘 박사의 한국농업발전 업적
# 채소의 1대잡종 채종체계 확립
해방 직후 배추, 무, 양배추, 양파 등의 우량종자 생산체계가 붕궤돼 거의 대부분의 채소 종자를 일본으로부터 수입 또는 밀수입해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들면, 1984년 무(궁중) 종자는 540,000L를 수입했다. 이에 우 박사는 동료들과 이들 채소종자의 자급자족할수 있는 종자생산체계 확립을 위해 집중적인 연구와실험을 수행했다. 잡종강세를 이용하기 위한 1대잡종종자 생산에 이어서 배추와 양배추 등에서는 자가불화합성(自家不和合性,self-incompatibility)을, 양파에서는 세포질웅성불임성細胞質雄性不稔性, cytoplasmicmale-sterility)을 각각 이용해 채종하는 생산체계를 확립했다.
이결과, 자가불화합성을 이용하여 육성한 배추의 1대잡종 품종인 원예1호 및 원예2호(1960), 양배추의 1대잡종 품종인 동천(1962) 그리고 웅성붙임성을 이용해 육성한 양파 품종인 원예1호 및 원예2호(1960)가 각각 발표됐다. 이 채종체계 확립에 관한 연구결과는 아쉽게도 우 박사가 서거 후에 발표됐다.
그리고 각 품종들의 양친 계통을 민간 종묘회사에 분양한 것도 우 박사 서거 이후에 이뤄졌다. 양친 계통을 분양받은 민간 종묘회사들은 배추, 무, 양배추, 양파 등 채소들의 1대잡종 종자를 생산해 보급함으로써 채소 종자를 자급할 수 있게 됐고, 양질의 채소를 안정적으로 생산해 공급할 수 있게 됐다.
# 육종가 양성
우 박사가 1950년 3월에 환국함에 따라 나라에서는 경남 동래에 농업과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우 박사를 초대소장에 임명하여 농작물 특히 채소의 유전·육종에 관한 시험연구를 수행토록 했다. 이시기에 연구소에서는 연구생 제도를 둬 대학 또는 전문학교를 졸업한 젊은 연구원들을 뽑아 우 박사가 철저한 교육과 지도를 해 훌륭한 육종가로서의 소양을 키웠다. 훈련을 받은 이 분들은 우 박사 서거 후에 국가 시험연구기관, 유수한 민간종묘회사 등에 진출해 채소 품종 육성과 종자 생산체계 확립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 제주도 감귤산업 발전의 기초를 닦다
우장춘 박사는 1951년 10월에 채소원종 생산과 일반 보금종자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적지를 착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해 해안선을 따라 여기저기를 살펴보았으나 기후, 토양, 용수 문제 등 자연환경이 채소원종과 보급종자 채종재배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우 박사는 제주도의 기후조건이리면 감귤 재배가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제주도 당국자에게 우량한 온주밀감을 도입하고 재배기술을 보급해 감귤재배 농가를 육성·지원할 것을 건의했다.
그 후 우박사는 일본을 다녀올 때마다 조생이면서 내한성이 어느정도 강하고 우량한 밀감 묘목을 갖고 와서 시험재배를 하게 하였고, 서귀포 동흥리에 1,500평 규묘의 밀감 시험지를 개설해 도입한 밀감 품종의 적응 시험을 실시했다. 이 시험지는 한국 감귤 재배 부흥의 산실이 됐으며, 한국국민이 감귤을 자급할 수 있게 된 것은 우 박사의 큰 공적이라고 말할수 있다.
# 무병 씨감자 생산 체계 수립
감자는 바이러스에 감연되면 수량과 품질이 급격하게 떨어짐으로 해마다 무병종서(無病種薯, disease-freeseed tuber)를 생산해 사용해야 된다. 감자에 감염되는 바이러스는 진딧물이 매개함으로 진딧물이 없거나 그 밀도가 대단히 낮은 지역에서 씨감자를 생산해야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표고가 높아 기온이 낮은 관계로 진딧물 밀도가 극히 낮은 대관령이 그 적지라고 말할수 있다.
우 박사는 대관령이 무병종서 생산의 적지라고 판단해 대관령을 중심으로 한 무병종서 생산체계를 수립해 무병종서의 생산과 보급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병 일<(재)우장춘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