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의 장미 사랑
옛 사람들의 장미 사랑
  • 원예산업신문
  • 승인 2020.07.1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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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성 장미의 최초 개화 기록은 12세기 후반
사계화에 대한 아름다움·가치 시로 표현

정원에 활짝 피었던 장미의 계절이 서서히 가고 있다. 온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꽃인 장미가 곧 다가올 장마철을 맞이하여 잠시 숨을 돌리는 것이다. 사실 장미는 연중 온도만 맞으면 꽃이 피는데, 덕분에 우리는 주변에서 절화 장미를 자주 보게 된다. 이렇게 한해 여러 번 꽃이 피는 사계성 장미를 중국에서는 월계화(月季花)라고 한다. 적어도 중국 송나라 이전에 육성되어 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해 여러 번 꽃이 피는 붉은 색상의 장미를 사계화(四季花)라고 하였다. 물론 문헌상 장미(薔薇)라는 꽃 이름이 자주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한해 한 번 피는 노랑색 덩굴장미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 초 여러 시인들이 안평대군 정원의 48가지 아름다움을 읊은 ‘비해당48영’에 보면 만가장미(滿架薔薇)와 사계화(四季花)가 따로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때에도 벌써 한해 한 번 피는(一季性) 장미와 여러 번 피는(四季性) 장미를 구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 문헌상 최초로 등장하는 사계성 장미의 개화 기록은 12세기 후반 개성 송악산 밑의 한 절(귀산사, 龜山寺)에서 겨울철 붉은 장미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13세기부터는 동국이상국집의 저자 이규보(1168~1241)의 시에 장미와 함께 사계화가 등장하는데 이를 보면 장미를 널리 기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말의 대학자였던 목은 이색(1328~1396)도 봄철 한 번만 꽃이 피는 장미류와 달리 여름과 가을철에도 꽃이 피는 사계화에 대한 아름다움과 그 가치를 시에서 표현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5세기 중후반의 서거정(1420~1488)도 덩굴성 노랑색 장미와 덩굴성에 대한 특별한 언급 없이 주로 빨강색 장미로서의 사계화를 여러 시에서 다뤘다. 이것을 보면 현재 장미처럼 한해에 여러 번 피는 장미류가 널리 사랑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최대 장미 애호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정경세(1563~1633)일 것이다.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학자이자 벼슬이 이조판서와 대제학까지 이른 문신인 그는 임진왜란으로 집이 소실될 때 지붕 높이만큼 자랐던 장미도 사라져버렸다. 몇 년 후 의병 활동과 조정의 벼슬 생활 후 귀향했을 때 집에 장미가 없는 것을 한스러워했다고 한다. 이때 주변에 꽃 기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전쟁 중 자신의 집에서 살아남은 장미를 캐어 와서 주기에 매우 기뻐서 구구절절 그 감사와 기쁨을 읊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가드너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도 그가 남긴 다산화사(茶山花史)라는 시를 읽어보면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장미를 분에 심어 길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한해 여러 번 피는 장미류를 사계화라고 하였는데, 그는 유독 중국 꽃 이름인 월계화를 고집하였다. 꽃 이름의 표준화가 정보의 교류에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중국에서 도입되어 우리나라에 와서 꽃 이름이 바뀌는 것을 매우 싫어했던 그로서는 당연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조선 초기 단종복위를 모의한 사육신이었던 이개(1417~1456)도 시에서 장미 사랑을 절절히 노래했다. “향기 풍기는 정원에 장미 그림자 어른어른, 나비는 춤추고 벌은 미쳐 어쩔 줄을 모르네, 나 또한 그윽한 흥을 견디지 못해, 온종일 애써 읊으면서 꽃 곁에 앉아 홀려 정신을 못차리네”

장미는 오늘날 품종 개량을 통해 더욱 아름답고 화려해졌다. 옛 사람들의 장미 사랑이 오늘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 품종 개발뿐 아니라, 꽃의 아름다움, 가치를 알리는 데도 힘을 쏟아야 할 때이다.

■서정남<농진청 원예원 화훼과 농업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