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 원예산업신문
  • 승인 2005.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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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불로장수=또 한나라 유향의 《열선전》에서는, 팽조가 국화를 먹고 1700세를 장수하였는데 얼굴빛은 17~18세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이와같은 국화의 상징은 황당한 신선설만 낳게 한 것이 아니라 일반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국화가 불로장수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국화에 기국연년·송국연년이라는 축수의 문구를 부쳐 장수화로 환갑·진갑 등의 잔치상에 헌화로 많이 사용하였다. 민화에서 괴석에 층층이 벌어져 피어 있는 국화를 그린 그림은 국화와 바위가 모두 장수를 뜻하기 때문에 고수와 익수를 뜻한다.국화의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국화주는 특히 애주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열선전》에 나오는 팽조는 술에 국화꽃을 띄워서 국화주를 만들었는데 위나라의 문제(文帝)가 15살밖에 못 산다고 예언되었던 것을 국화주의 비법을 알려주어 장수하게 했다고 한다.또 후술하는 비장방의 고사에서는 국화주가 액막이의 용도로 등장한다. 이리하여 불로장수나 액막이를 위하여 국화주를 마시는 풍습을 낳게 되었다.일본에서 만들어진 화투의 9월 국화에 술잔이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은 단순한 풍류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와 같은 연명장수의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일본의 왕실 문장=일본에서 국화는 왕실 문장으로써의 존엄성을 나타낸다. 왕가는 16화판의 팔중국이고 왕족은 14화판의 이국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국화는 일본왕실을 상징한다. 일본의 일등공로 훈장도 국화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도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욱울기(旭日旗)는 흰 바탕에 동그라미가 가운데 그려져 있고 사방으로 붉은 줄 열여섯 개가 빛살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데 이것은 해가 뜨는 모양을 그린 것이 아니라 둥그런 꽃술 다발주위에 열여섯 장의 꽃잎을 가진 국화를 그린 것이다.일본 왕실에서는 12세기 경부터 일부 왕들이 국화를 문장으로 사용하였으나 정식으로 왕실 문장으로 결정한 것은 1869년(명치 2년)이다.▲민속△중양절=음력 9월 9일을 중구(重九) 또는 중양절(重陽節)이라고 했다. 중구는 9가 겹쳤다는 뜻이고 중양은 양이 겹쳤다는 뜻이다. 9는 양수 가운데서 극양이므로 9월 9일을 특히 중양이라 한 것이다.예부터 이날 민간에서는 노년은 노년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또 여자는 여자들끼리 서로 모여 특별한 음식을 장만하여 단풍이 물든 산이나 경치 좋은 계곡으로 나들이를 하였다. 문사나 화가들은 주효를 갖추어 단풍의 명소나 국화가 있는 곳을 찾아가 국화주의 잔을 권하고 받으면서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고 하여 하루의 청유를 즐겼다. 이것은 예로부터의 풍속으로 단풍이 있고 국화가 있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한다.《동국세시기》에는 9월 9일에 노란 국화를 따다가 찹쌀전을 만드는데 방법은 3월 삼짇날의 진달래전과 같고 이를 화전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양나라 오균의 《서경잡기》에 “한 무제 때 궁녀 가패란이 9일에 떡을 먹었다”고 하고 또 송나라 때 맹원로의 《동경몽화록》에 “도인이 9월 9일에 밀가루를 쪄서 전을 만들어 서로 준다”고 했는데 국화전이 여기에서 기원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이 중양절이 우리나라에서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서의 중양절에 관한 기록과 고려가요 동동의 9월령에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그 역사가 오래임을 알 수 있다.중양절 때 즐겨먹는 음식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국화전과 국화만두, 국화주이다. 중양절에 국화주를 마시면 무병장수한다고 했는데 궁중에서도 축하주로 애용하였다. 또 도성에서 변경지방으로 부임할 때는 벗의 먼 여행길의 안녕을 비는 액막이의 뜻으로 성밖까지 전송하며 국화주를 나누어 마셨다고 한다.중양절을 시제로 한 시는 대단히 많다. 그 가운데 특히 많이 알려진 한시 두 수를 여기에 소개한다. 조선 명종 시대의 문인 북창 정렴이 9월 20일이 지나서 늦은 국화를 읊은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19, 29가 모두 9자 수인데9월 9일로 정해진 때가 없도다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지 못하나활짝 핀 국화만이 이것을 알리라이에 대하여 그의 아우 고옥(古玉) 정작이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뭇사람들은 중양절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지만반드시 중양절만이 흥이 더 많은 것은 아니다국화를 마주 보며 술잔을 기울일 수 있다면구추 어느날인들 중양이 아니랴.그 뒤에 이 두 시를 대제학 유근에게 이야기했더니 유근은 고옥의 시를 취하고 북창의 시를 버렸다고 한다.